A. F. M.
터들이.
인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무엇인가를 없애야만 했다. 그러나.
I
정오뉴스
오늘 오전 11시 30분경 20대로 보이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 한 사람이
또 숨졌습니다. 경찰당국은 아마 자살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달 들어 이
런 사건이 벌써 다섯 차례 일어나고 있지만 경찰측에서나, 병원측에서나 모
두 그 정확한 원인을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자살이라니.
오늘은 병원을 가는 날이다. 나는 면도를 하고 늘 입던 잠바를 입고 길을
나섰다. 우리집 앞에 있는 나무가 보였다. 어느새 나무라고 부르기 힘든 나
무가 되어 있었다. 작년 구청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전지작업을 하더니 이꼴
로 만들어 놓았다. 가지도, 잎도 없는 나무. 목재소에 가면 환영 받을 나무
였다. 단 뿌리가 땅에 있다고 구청은 가로수라고 이름 부르며 관리하고 있
는 것이다. 이젠 더 이상의 전 지작업이 필요하지 않는 나무로 만들어 놓고
는.
노래가 들린다.
해가 오늘도 뜬다. 달리는 자동차, 서있는 사람들
달이 오늘도 뜬다. 불켜진 아파트, 일하는 사람들
"닥터 김, 빨리 수술실로 와보게."
오늘따라 과장영감은 왜 저리 깝치는지.
"이상하지 않나?"
"별로요."
"기도 아랫부분을 잘 보게, ..... 어떤가?"
"혀도 나와있고 목에 자국도 있는 걸 보면 목 졸려 죽었군요. 살인 사건
의 희생자군요. 이런 일은 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걸세. 이 환자는 어제 호흡곤란으로 내게 왔던데,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어. 그래서, 그냥 진정제나 줘서 돌려 보냈지.
그랬더니 어제 저녁 응급실로 왔더군. 그리고는 한시간도 안되어 죽었지."
"혹시 다른 곳의 이상이 아닐까요?"
"내가 오늘 아침 다 확인해 봤네."
"과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모르겠네. 병원생활 20년에 이런 일도 다 있다니 인간의 한계야."
"혹시 정신질환이 아닐까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만. 그러나 요즘에는 정신과 닥터가 필요없을 정
도로 정신질환이 발생하지 않지 않나?"
그건 사실이다. 내가 본과에서 공부할 때도 정신과파트는 다루지 않았다.
단지 다른 파트 교수들이 잠깐 언급할 뿐이였다. 난 그리 기분 좋은 마음으
로 수술실을 나오지 못했다. 오늘은 왜 이런담. 차나 마시러 가야겠다.
II
어제 저녁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결국 오늘 일이 시작되었지. 예
정보다 일주일이 빨라 배탈인가 생각했는데, 예감이 이상하잖아. 그래서 준
비를 해뒀지. 오, 이 철저한 준비성. 어휴, 오늘도 기분 잡치는 날이 되겠
구만. 그래도, 이번 달은 빨래가 수월하다는 것으로 조금의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난 일만 시작하면, 모든 의욕이 없어져 버려. 그래서 친구들도 내
일중을 잘 눈치채지. 하기야 나만 이런 것도 아니지. 수없이 던지는 물음이
지만 그 답은 아직 못 찾았지. 그리고 이젠 잊고 살기로 했지. '왜 여자만
......' 일단 화장을 해야하고, 만일을 대비해 흰색 바지는 안입어야 하고
,..... . 늘 하는 생각들을 오늘도 하며 집을 나섰다.
"아가씨 오늘 어때? 나랑 멋지게 놀아보지 않을래." 어휴, 저런 머저리같
은 놈. 속 사정도 모르면 그냥 길이나 갈 것이지 왜 기분을 긁느냐 말이야.
"야, 안꺼져! 니하고 노는 그런 값싼 분이 아니시니까 볼일이나 보쇼."
쇼핑이나 해야겠다. 쉬는 날 시간 보내기에는 쇼핑이 제일 좋지. 가게가
줄서있는 거리를 걷는 것은 작은 흥분을 만들어내지. 침대에서 애무당할 때
처럼. 흰색 긴치마가 눈에 띄었다.
"이 치마 파는 거에요?" 나도 멍청하지 파니까 진열해 놓은 것 아니야.
긴 치마를 입으면 내 직업이 숨겨진다는 사실이 조금 찝찝했지만 그래도 유
혹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넌 왜 이 일을 하지?"
"별걸 다 묻는군, 좋았으면 됐지 왜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돌아서 가겠지. 난 남자들이 일 하고나서 이것 저것 묻는
것은 딱 질색이거든. 그냥 한바탕 즐겁고나서 찾아드는 피로를 이 침대에서
잠으로 풀면 모든 것은 끝나버리는 거야. 하루 밤 한 번이면 먹고 살기에는
충분하니까. 물론 내가 더 하고 싶어지면 수첩을 뒤적이지만. 남자들은 내
직업이 마치 자기네 공동 화장실 쯤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야.
남자는 옷을 입고는 말없이 내 방을 나갔다.
III
나는 정오뉴스가 생각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요 며칠사이 자살한 사람들의 사망진단서를 단말기로 보내
달라고 했다. 내 책상 앞 단말기에서 나타나는 사망진단서의 사망원인은 하
나같이 '불명(질실사로 추측)' 이었다. 오늘 우리 병원에서 죽은 사람도 그
렇다. 분명 단순 자살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장실로 갔다.
"박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질식사한 환자 말입니다."
"그래, 그러지 않아도 그 문제를 나도 지금 생각하고 있네."
"방금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요 며칠 사이 뉴스에서 보도된 자살한
사람 모두의 사망원인이 같습니다."
"그래?"
"혹시, 새로운 병이 아닐른지...."
"일단 그 생각은 접어두세. 확실한 사망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치료
방법도 모르는데, 괜히 긁어 부스름 만들지는 마세. 그냥 우리끼리만의
이야기로 해두세."
나는 또 나의 지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학생시절 일주일 연구실에 꼬박
보내며 알아낸 베타증후군 - 물론 지금은 완치 가능한 기관지 질환이지만 -
이것을 발견한 후 난 얼마나 가슴 설레였는지 모른다.
우선 난 경찰청에서 사망자 신상서를 구했다. 그리고 단말기 앞에 앉아
그것들의 공통점을 찾고자 했다.
A. 25세 남 의대생.
B. 28세 여 교사.
C. 35세 남 청소부.
D. 20세 남 학생
E. 32세 여 주부.
.....
IV
이런 젠장, 이 달콤한 잠을 깨우는 녀석이 누구야, 저놈의 전화는 왜 저
렇게 시끄럽담. 이런 포근한 아침엔 영업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자동응답
이 시작되었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남길 말씀이 있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음, 내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섹시하단 말이야.
"언니, 나 이상해, 자꾸 답답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답답하다고 이 아침에 전화질이야. 난 수화기를 들
었다.
"야, 이 기집애야, 답답하면 냉수나 먹어라."
"언니, 나.... 좀...... 도와줘..."
분명 탈이 난긴 난 모양이군. 이런 아침부터 재수 옴붙었군.
나는 미애라 부르는 춘자 아파트로 갔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들,
술병, 그리고 넥타이가 눈에 띄었다. 춘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애가 어디
간거야, 화장 실에 갔나. 아니면 약 사먹으러 갔나.
저기 욕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샤워할 때 들리는 오줌사는 소리. 그런데
춘자가 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얘가 물틀어 놓고 약 사러 갔군.
난 물을 잠그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이런, 춘자야, 여기서 뭘 하니, 너 죽을려고 하니?"
"언니, .... 숨을..... 숨을...."
V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난
다시 수술실로 갔고, 검시지료를 모두 내 휴대용 단말기에 입력시키고 다
시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에 가시 검시자료를 얻어 다시 분석해 보기로 했다.
분명 범행이 아니라, 질병인 것 같았다.
감마증후군.
원인 : 아직 미확인.
증상 : 초기; 호흡곤란
증기; 기도 막힘
말기; 목이 조여 자살한 모양으로 사망
치료 : 아직 미확인.
우선 이렇게라도 학계에 보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더 이쪽으로 잘 아는 분들이 이 문제를 풀지도 모르니까.
"내과 닥터 김, 빨리 응급실로 와주십시오."
낭창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막았다.
"어느 환잡니까?"
"3번 입니다."
"언니, ...... 병희시."
"춘자야, 춘자야!"
"간호사, 빨리 인공호흡 준비. 산소마스크."
혀가 길게 나왔고 숨이 멎었다. 난 환자의 가슴을 세게 눌렀다. 산소 마
스크가 준비 되었을 때는 이미 맥박이 없었다. 난 환자의 목을 봤다. 역시
심하게 목이 졸려있었다.
"병희 그자식, 누구야, 이꼴로 만든 놈이 누구야!"
"진정하십시오. 목졸린 자국이 심하게 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자식이야, 병희 그자식."
난 먼저 살인사건이라고 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은 곧 병희라는 남자를
체포했다. 여러날 결려 죽은 여자의 아파트를 오가며 신문 했으나, 그 남자
는 무협의로 풀려났다.
분명 살인이 아니였다. 자살도 아니였다. 그리고, 자살한 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VI
이런 시간만 낭비했잖아. 오늘은 그렇듯한 자식을 물어야겠는 걸. 그 춘
자년 때문에 괜히 답답하잖아. 그짓이라도 해서 잊어야. 물론 물건이 좋아
야 하지만. 오늘 밤은 그래도 꽤 괜찮은 물건이어야 할텐데.
어휴, 하지만 춘자..... 어휴 답답해. 속터져. 도대체 병희라는 녀석이
누구야. 하기야, 나랑 상관 없지. 죽은 춘자만 불쌍하지. 이 답답한 속. 샤
워나 해야지. 전화가 왔다.
"저, 병원, 춘자씨 담당의사입니다."
"나랑 상관 없는 일입니다."
"저,"
"글세, 나랑 상관없다니까요. 가뜩이나 답답해 죽겠는데, 자꾸 신경쓰이
게 할거 에요."
별난 의사 다 보겠네. 죽었으면 해부용으로 배를 가르든지, 묘지에 보내
든지 할 것이지 뭐가 아쉬운 게 있다고, 참 할 일 없는 의사야, 그건 그렇
고, 의사들의 물건이 좋다던데 한 번 물어봐. 흐흥...
VII
"난 돈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받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춘자씨, 아니, 미애씨와 관계를 가진지 오래 됐나요?"
"한 두 달 됐죠. 다른 놈들은 그래ㄷ 다 괜찮은데 하필이면 왜 그런 여자
를 만나서, 나 원 참 더러워서."
"관계 밖의 다른 일은 없었나요?"
"무슨 일 말입니까? 아파트 혼자 사는 여자와는 함께 자는 일 빼고는 무
슨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혹시 전화라든가, 편지라든가, 집으로 찾아오지는 않았는지요?"
"전화야 같이 자지 않는 밤이면 으레 왔죠. 물론 나도 심심하면 했구요.
물론 뻔한 이야기를 했죠. 참 죽기 며칠 전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좀 볼 수 있을까요?"
"별 말 없었습니다. 그걸 어디 뒀더라."
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 저기 붙어 있는 여자의 누드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보통 여자라면 한 번쯤 다른 마음을 품어봄직한 병희라는
남자의 뒷모습도.
"여기 있군요."
보고싶군요, 병희씨.
잠은 잘 잤는지요? 아픈 데는 없는지요?
일은 잘 되구요? 오늘은 뭐하고 지냈어요?
아침 날씨가 차던데 옷은 잘 입었는지요?
오늘 올 수 있어요?
건강하세요.
미애.
난 편지를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이상한 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실마
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엉킨 실타래를 찾은 느낌이었다.
"죽기 전날 밤은 그 아파트에서 잤나요?"
"아뇨, 만날 사람이 있어 11시가 좀 넘어 나왔죠. 참 그 넥타이."
"무슨 넥타이 말입니까?"
"그 여자가 달라고 해서 준 것 뿐입니다. 그런데 경찰은 그것으로 내가
그여자를 죽인 것으로 알고 있어 고생 꽤 했죠."
난 병희라는 사람의 집을 나왔다. 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엉
켜있는 것같았다. 그 편지. 분명 무엇을 말해 줄 것 같은데 무엇을 말해주
는지. 나는 또 단말기 앞에서 변한 것 하나 없는 그 사망진단서와 사망자신
상서를 보고 있었다.
VIII
이런 비러먹을, 번 돈 병원에 다 쓰겠네. 염병할 의사, 뭐, 좀 쉬고 마음
을 안정시켜라구. 난 언제나 쉬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잠자리에서 일하는
것만큼 마음 편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런 염병할. 아, 좀 속이 시
원하군. 이제 좀 살 것 같아.
이젠 나도 늙었는 모양이다. 힘이 딸리니 말이다. 이젠 이짓도 그만 두어
야겠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괜찮은 남자만 있으면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춘자가 죽은 후 내겐 작은 다짐이 생겼지. '그래 남자는 다 조심해야 되는
거야.' 라는 경희 언니의 말이 결코 잔소리가 아님을 알았지.
병원 의사 말이야. 그놈 괜찮겠던데 어떻게 한 번 안될까. 하기야 나같은
년 말고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놈인데. 아냐 한 번 시도는 필요하지. 내
가 언제 실패한 적이 있어. 모 국회의원도 내 아파트를 아는 걸. 히히
"저, 거기 김박사님 집입니까?"
"누구십니까?"
"나예요, 춘자언니. 며칠전 병원에 찾아 갔었죠?"
"왜 또 아픕니까?"
"아니에요. 그냥 전화를 해봤죠."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아니 이런 횡재가. 이럴수록 침착해야지.
그래 차근하게 유혹 해야 하는 거야.
"왜요, 무슨 일로요?"
"춘자씨 일때문인데요."
계획이 빗나갔잖아. 왜 또 춘자 이야기야. 이런 젠장. 하지만 내 계획을
이룰려면 먼저,
"춘자에 관해 물어볼 말 있으면,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데까지는 대답
해 드리죠."
"춘자씨 아파트를 한 번 들렸으면 하는데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예, 물론 기꺼이 도와 드리죠. 그리고 저기.... 치료를 받고 싶은데요."
"전번 진찰에 아무 이상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자꾸 가슴이"
이건 하나의 계획이었다. 이렇게 병원에 가서....
다음날 나는 병원을 찾아갔다.
"맥박수, 혈압, 체온 모두 정상인걸요. 어디가 어프세요?"
"가슴이 자꾸 답답하고 아니, 속에서 꼭꼭 찌르는 것같아요."
이 말을 하면서 의사손을 잡고 내 가슴으로 가지고 갔다. 처음에는 잠깐
놀라더니, 꼼꼼히 만지며 살펴보기도 했다. 이런 이건 예상과 빗나갔잖아.
이건 완전 진찰이잖아. 정밀 검사가 있었다.
"그거 참 이상하네요. 이상한 데가 없습니다. 언제부터 아팠죠?"
"모르겠어요. 아마 요 며칠전부터 아프기 시작한 것같아요."
"지금도 아픕니까?"
"아뇨, 지금은 아프지 않아요. 선생님 얼굴을 보니까 아픈 것이 어디로
가고 없네요. 전에 전화로 말씀하신 이야기 말입니다. 제가 춘자 아파트
로 안내할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선 진찰이 끝났으니까. 조제실에서 약 타
서 먹어 보고요, 또 아프면 더 큰 병원으로 가보셨야겠어요. 제가 소개해
드리죠. 여기 장비로는 알 수가 없네요."
"제가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있고 그 곳 지리도 더 잘 알아요."
"고맙군요. 전 폐 끼칠까봐 사양했습니다."
IX
수사가 끝난 아파트는 다른 아파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살인 사건
이 일어 났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었다는 것 뿐. 수사
에 필요한 모든 자료는 경찰이 가지고 가고 없어 그냥 깨끗이 정리된 아
파트였다. 나는 안내를 받아 거실, 주방, 욕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침실
도. 침실에는 대낮에도 커텐만 치면 밤을 만들 수 있는 짙은 색 커텐과 화
장품이 가득한 화장대와 장농과 침대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얜 아직도 이 책을 보고 있었군."
"무슨 책입니까?
"보세요."
난 까맣게 책꺼풀이 입혀진 책을 받았다. 그냥 책을 넘겼는데 그 책속에
는 성행위의 체위가 그려져 있었다. 넘기니 보니 계속 다양한 성행위의 체
위가 그려져 있는 그런 책이였다. 또한 섹스할 때의 주의할 점, 온통 그들
의 직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책표지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책은 내가 선물로 준거죠."
"왜요?"
"춘자가 이 일을 하고 싶어하기에 줬죠. 나도 이 일을 시작할려고 할 때
아는 언니로부터 선물받았는 거죠."
"제가 좀 봐도 되죠?"
"물론이죠. 또한, .... 그렇게 해드릴 수도 있죠."
X
이런 내가 큰 실수를 했군. 일을 하고는 반드시 돈을 받아야 하는데 그때
내가 왜 돈을 안받았을까. 바보야. 왜 이러지 키스는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어휴 멍청이. 일을 못하겠군. 하지만, 좋았어, 어느 때 보다. 분명 내가 그
때 뭔가 씌인 모양이었나봐. 옛날 이 일이 하기 싫을 때 주사 맞고 한 적이
있었지. 그때 그 기분과 비슷했어. 그런데 분명 이번에는 주사도 안맞았는
데..... 또 하고 싶군. 전화할까. 또 만나줄까. 왜 그땐 책의 주의사항이
생각 안났을까, 다른 남자하고 있을 땐 잘도 생각나던 것이. 그 사람이 좋
아하던 모습. 그 사람이 숨쉬던 소리. 그 사람이 ....
어휴 답답해 그만 생각해야지. 더 생각한다고 해서 지금 한 번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은....
"여보세요?" 이사상이었다.
"이렇게 일찍요? 난 지금 나가기 힘든데요." 남자들이란, 밤낮이 없어.
시도 때도 없이 날 찾아. 돈도 좋지만 좀 쉬어야겠단 말이야.
"아니, 나갈 수 없다구요." 참 꽤나 귀찮게 구네.
"돈도 좋지만 좀 쉬어야겠어요. 하고 싶으면 이리로 와요. 난 못가겠어
요."
염병할 놈. 한바탕 신경질을 부리는 바람에 어제밤 새로록 뒤척이다가 아
침 늦게서야 든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아침은 먹어야겠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사장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꼭 뭐에 굶주린 사
람처럼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난 그냥 누워 있었다. 이사장은
아무 말없이 그냥 카드 한 장을 던져두고 그냥 가버렸다. 사실 나도 뭐 그
리 나쁘지지는 않았거든. 어젯밤 그 기분이 사라지니 한결 좋았다. 여행이
나 할까? 아니면 소핑이나 할까?..... 의사선생이나 불러 볼까?
엉망으로 어지려진 침대를 정리했다.
XI
춘자-병희....,춘자-병희....,춘자-병희
섹스-직업....,직업-섹스,
춘자-섹스-병희=춘자-직업-병희.
아니, 이런 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죽은 다른 사람들도 알아보자.
그런데 그들 또한 아무런 사인이 없으니, .....
그래, 샤워나 하고 푹 쉬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보자. 난 욕실에서 샤워하
를 하고 피로회복실 침대에 누웠다. 몇해전 우리 병원 최박사가 발명한 이
피로회복실이 세상에서 놀랄 정도로 인기를 얻자 나도 한 달전 무리하게 설
치를 했다. 이 방에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고, 편안히 쉴 수도 있어, 나로
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고장이
났는지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뭘할까 생각하다가 신문이나 읽을까 했는데
최박사가 신문은 절대 금물이다고 하는 말이 생각나 방을 살펴보았다. 지난
번 춘자라는 사람의 집에서 가지고 온 그 책이 생각났다. 나로서는 싸구려
3류 소설같지만 그들로서는 성서나 다름없는 이책. 난 이 책을 들고 피로회
복실에 누웠다. 첫 장을 넘기는데 책 표지가 얼룩덜룩 했다. 못 보던 것이
였다. 유심히 살펴 보았다. 무슨 그림같아 보이기도 하고 글자같아 보이기
도 하고, 난 자세히 보기 위해 다시 방으로 나왔다. 그런데, 피로회복실을
나왔을 때는 책표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까만색 책 표지를 벗겨보
았다. 그랬더니 역시 일반 책과 같이 노란색 속표지 뿐이었다. 다시 난 피
로회복실로 들어갔다. 다시 책표지를 살펴보니 그 얼룩들이 또 보이기 시작
했다. 나는 유심히 살펴보다가 검은색 책꺼풀을 벗겨보았다.
.......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그 노랑 속표지에서 그
림과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세 성당변화와 같이 원색의 색체와 단순한
선의 조형으로 성행위장면이 노골적으로 그려진 그림, 그리고 화려하게 장
식된 알파벳 글자들.
AMATE AMATE
AMATE USQUE AD MORTEM
AMOR FACIT MORTEM
대학 다닐 때 배웠던 라틴어였다.
아마떼와 아모르는 처음 보는 단어였다.
나는 단말기 앞에 앉았다. 도서관 사전목록을 찾았다. 라틴어사전을 찾
아 amor를 입력해 보았으나 기제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다시 목록을 뒤졌
다. 고문서 자료실에 15세기 출판된 사전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이 사전
을 보려고 하니 '접근 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나왔다. 인출불가능? 왜? 이
런 젠장 되는 일이 하 나도 없군. 그래 내일 도서관에 가봐야겠군.
XII
백화점에 갔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화장과 옷이 중
요하지. 야하면서 천박해 보이지 않는 화장, 그리고 내 은밀한 곳을 보여
줄듯 말듯한 옷.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난 언제부터인가 이런 화장품과
옷들만 샀지. 물론 이번에도 이 이유 때문에 백화점에 갔고.
화장품 코너에서 서성이다 옷을 보러가는 길에 남성 악세사리 코너를 지
나게 되었는데, 빨강에 보라색 무늬의 넥타이가 눈에 띄었다. 참 예뻐보였
다. 난 가끔 남자 넥타이도 메니까. 그 넥타이를 요모조모 살펴보고 있으
니까 종업원이 말을 건네왔다.
"요즘 유행하는 제품입니다. 한 번 메어보시죠. 참 잘 어울리겠는데요.
아저씨에 게 선물하면 좋아하실 거에요."
"아저씨?" 남의 속도 모르고...., 그래.
난 용기를 내어 예쁘게 포장해 달라고 하고 옷을 보러 갔다.
요즘은 그물옷이 유행이라 온통 그물들 뿐이였다. 어디 물고기 잡는 모양
이지. 그래 남자도 물고기의 한 종류일거야. 무슨 옷을 살까 망설이다가 흰
원피스가 눈에 띄었다. 유행이 지나간 촌스러운 옷, 그리고 내 취향에는 전
혀 맞지 않는 옷, 그저 정숙한 체 내숭떠는 여자가 있는 옷. - 여휴, 어떻
게 저런 옷이 아직도 있담. 그러나, 나는 그 옷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왜
냐? 그것은 바로 나도 내숭 떨 일이 생겼기 때문이지.
기분 좋은 마음으로 집에 왔다. 그러나, 작은 설레임이 나도 모르게 일어
나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옷을 입으면 그 의사가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빨리 보여주고 싶어진다. 꼭 옛날 도둑질 하다가 틀킨 기분이 든다.
XIII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는 내과전문의인데요. 사전을 좀 보려고 하는데 자료관리실장님 좀 뵐
수 있을 까요?"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한 늙은 노인네가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예, 15세기 때 출판된 라틴어 사전을 좀 보려고 왔는데요. 집에서 볼 수
가 없어서요."
"그것은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죠?"
"그 사전 열림은 제 권한이 아닙니다. 이 도서관이 생기고부터 그 사전은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죠?"
"나도 모르죠. 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또한 찾는 사람도 전혀 없었
습니다. 그 사전이 있는 것조차도 시람들은 기억을 하지 않습니다."
난 사정을 이야기 했다. 어제 본 그 라틴어가 무슨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관리실장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후 그는 날 고
서 보관실로 데려갔다.
"이 책을 본 것에 대한 뒷책임은 내가 질 수 없습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분명 인류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신 분으
로 기억될 것입니다."
인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없애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사랑할려고 하는 마음'이다. 과학자들은 그것
을 없애기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결국 해답을 찾았고 당국은 이
사전을 금서로 규정지었다. 앞으로 이 사전을 보는 사람은 법의 처
벌을 받게 됨을 알린다.
도서관장 백.
라틴어 사전은 이 글이 적혀 있는 붉은 종이로 밀봉되어 있었다.
Amate Amate - 사랑하라, 사랑하라
Usque ad mortem - 죽기까지
Amor facit mortem - 사랑은 죽음을 불러온다.
XIV
"닥터 김입니다."
"저에요."
"무슨 일이죠?"
"또 가슴이 답답해요. 이젠 숨쉬기가 곤란해요. 전번보다 더 답답해요."
"당장 그리로 가죠."
난 의사 선생님께 보이기 위해 흰 원피스를 입었다. 계속 심호흡을 해야
만 했다, 계속.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슨 일 있었습니까?"
"보고 싶었어요...."
"우선 진찰부터 해 봅시다. 먼저 목을 조르는 것 같지 않나요?"
"예, 누군가가 내 목을 막 조르는 것 같군요."
"아마, A. F. M. 증후군 같습니다."
"그게 뭔데요?"
"사랑을 하면 죽는 증상이죠?"
"사랑?"
"나도 아직 확실히 모르지만 이제껏 원인 불명으로 자살한 모두가 그 증
후군으로 죽은 것같습니다."
"나도 그럼 그 병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단지 아는 것이라고는 누군가가 몹시 보고 싶거지거
나, 그 사람을 위해 뭔가 한다거나 하면 나타나는 증상이죠."
"내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참, ..... 선생님께 드릴 ..... 선물을 ....
샀어요... 넥타이에요...."
"아직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이증상이 당신에게 나타났다는 것 뿐. 난 아
무 도움이 되어줄 수가 없군요. 하지만 꼭 알아내겠습니다."
"사랑? 그래 난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 같네요. 그리고 이것으로 죽는다면
....."
XV
의학계에 보고를 했다. 새로운 질병의 발견을, 사망률 100%의 이 질병을.
인류가 생겨나면서부터 계속 관심을 가져온 것은 '죽음'의 문제였다. 인
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우렸고, 자연사는 '사랑'과
관계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과거 인류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며 살았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대뇌에서는 A.F.M. 에너지가 생성되어 연수로 옮겨가게 되고 이 에너지는
호흡신경세포를 파괴해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과거 인류는 이 에
너지에 대한 면역이 있어 서서히 호흡신경을 파괴되어갔고 인류는 이를 '자
연사'라 하여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인류의 끝없는 욕심은
결국 사람들이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죽지 않는다는 위대한 진리를 알아내
었다. 그리고는 인류는 '사랑하기'를 금지 시겼던 것이다. 결국 진화를 거
듭해서 자연사를 해결한 인류가 생겨났고, 이들은 A.F.M. 에너지에 대한 면
역성이 없었다. 그들에게 사랑은 급속한 호흡신경 파괴를 가져다 주는 것이
되었다.
난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이 생겼다. 바로 질병의 백신을 만드는 일. 아무
리 난치병이라도 분명 정복되고 말 것이다. 내가 아니면, 내 후학자에게서.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다.
인류여, 사랑하지 말라!
"사랑은 죽음은 불러온다."
- 끝 -